다빈치, 이어령, 랜디 포시는 죽음 앞에서 무엇을 남겼나: 세 갈래 패턴으로 만드는 나만의 버킷리스트
지난 글에서 저는 버킷리스트 앞에서 단 한 줄도 적지 못했던 당혹스러운 경험을 나눴습니다. 남들은 세계 일주니 마라톤 완주니 멋진 계획을 잘만 채워 넣는데, 나는 어디서부터 무엇을 써야할지 막막하여 창피하기까지 했습니다. 인생 헛 살았나 싶다가, 궁금한게 떠올랐습니다.
‘역사에 남을 만큼 치열하게 살았던 사람들은, 정작 삶의 끝자락에서 종이 위에 무엇을 남겼을까?’
세 인물의 마지막 궤적을 추적해 보았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다재다능했던 천재 레오나르도 다빈치, 한국의 지성을 대표했던 故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 그리고 췌장암 말기 판정을 받고도 전 세계에 깊은 울림을 준 ‘마지막 강의’의 랜디 포시 교수입니다.
놀랍게도 세 사람이 남긴 목록은 서로 완전히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어떤 이는 어린아이 같은 호기심을, 어떤 이는 삶을 바라보는 시선의 전환을, 또 어떤 이는 가슴 깊이 묻어둔 오랜 꿈을 꺼내 들었습니다. 그들이 남긴 세 갈래 패턴을 들여다보면, 막막했던 우리만의 목록을 채울 명확한 단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패턴: 레오나르도 다빈치 — 목적지가 아닌 ‘순수한 호기심’
다빈치가 남긴 약 7,200페이지 분량의 노트 속에는 1490년대 그가 매일 적어 내려간 할 일 목록이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천재 예술가이자 과학자의 메모라고 하면 인류를 바꿀 거대한 발명이나 위대한 명작 구상이 적혀 있을 것 같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습니다.
- “밀라노와 교외의 지도를 구하고 시가지의 치수를 잴 것”
- “물에 뜨는 신발을 만들어 물 위를 걷는 법을 실험할 것”
- “산악인에게 사슴 가죽으로 눈길을 걷는 법을 물어볼 것”
- “딱따구리의 혀는 어떻게 두개골을 감싸고 있는지 관찰할 것”
그의 목록은 거창한 사회적 성취나 소유욕 대신, 주변 세계를 향한 지극히 순수한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다빈치에게 죽기 전까지 가장 중요했던 것은 ‘무엇을 달성했는가’가 아니라 ‘내가 오늘 이 세계에 대해 무엇을 새롭게 알게 되었는가’였습니다.
다빈치의 목록에서 배울 점은 명확합니다. 버킷리스트가 반드시 무언가를 “달성하고 소유하는 목록”일 필요는 없습니다. “알고 싶은 것”, “관찰하고 싶은 것”, “새롭게 배워보고 싶은 기술”도 훌륭한 목록이 됩니다.
- 다빈치식 질문: “결과와 상관없이, 나는 지금 이 세상에서 무엇이 여전히 궁금한가?”
두 번째 패턴: 이어령 — 행동의 나열이 아닌 ‘존재 방식의 전환’
이어령 선생은 암 말기 판정을 받은 후 적극적인 항암 치료 대신 남은 시간을 오롯이 받아들이는 길을 택했습니다. 그는 이 시간을 병과 싸워 이겨야 하는 ‘투병(鬪病)’ 대신, 병과 나란히 걸어가는 ‘친병(親病)’이라 불렀습니다. 육체의 고통을 적으로 돌리지 않고, 삶의 필연적인 한 조각으로 품어 안겠다는 결단이었습니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글을 쓰고 구술 인터뷰를 남기며 지적 작업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생각과 언어가 기록으로 남아 누군가의 가슴에 닿는다면, 그만큼 자신의 생명도 연장되는 것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어령 선생의 방식은 다빈치와 결이 완전히 다릅니다. 그는 체크박스를 하나씩 지워나가는 ‘할 일 목록(To-do list)’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대신 하루하루의 결을 어떻게 벼릴 것인가 하는 ‘존재 방식(To-be)’을 정립했습니다.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면, 지금 숨 쉬는 이 1초가 생애 가장 농밀한 순간이 된다”는 그의 말처럼, 선생은 무엇을 할지보다 어떤 태도로 지금을 살아낼지를 목록의 중심에 놓았습니다.
- 이어령식 질문: “무엇을 더 채우기보다, 나는 남은 하루하루를 어떤 마음가짐으로 마주하고 싶은가?”
세 번째 패턴: 랜디 포시 — 잃어버린 ‘어린 시절의 꿈’ 회수하기
카네기멜런대의 컴퓨터공학 교수 랜디 포시는 47세라는 젊은 나이에 췌장암 말기로 수개월의 시한부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는 어린 세 자녀와 제자들을 위해 강단에 서서 전설적인 ‘마지막 강의(The Last Lecture)’를 남겼습니다.
그 강의에서 포시 교수가 스크린에 띄운 것은 어른이 되어 세운 번듯한 목표가 아니었습니다. 바로 어린 시절 품었던 꿈의 목록이었습니다.
- 무중력 상태를 직접 경험해 보기
- 내셔널 풋볼 리그(NFL) 경기 뛰어보기
-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한 항목 기고하기
- 스타트렉의 커크 선장 만나보기
- 디즈니 테마파크를 설계하는 ‘이매지니어(Imagineer)’ 되기
포시 교수는 자신이 그 순수한 꿈들을 어떤 우여곡절을 겪으며 현실로 만들었는지를 담담하게 풀어냈습니다. 그의 접근법은 다빈치의 호기심이나 이어령 선생의 실존적 태도와 또 다릅니다. 사회의 기준과 현실의 벽에 부딪혀 서랍 깊숙이 밀어 넣어두었던 ‘과거의 나’를 찾아가 화해하고, 그 시절의 약속을 회수하는 방식이었습니다.
- 랜디 포시식 질문: “현실이라는 핑계로 서랍 속에 덮어둔, 어릴 적 순수했던 내 열망은 무엇이었는가?”
세 패턴을 비교하면 보이는 것
세 인물의 궤적을 나란히 놓아보면, 우리가 왜 그동안 버킷리스트 앞에서 펜을 멈칫거릴 수밖에 없었는지가 드러납니다.
| 인물 | 핵심 질문의 방향 | 목록의 본질 | 나에게 맞는 경우 |
| 레오나르도 다빈치 | “무엇이 궁금한가?” | 관찰, 배움, 지적 탐구 | 결과보다 탐색하는 과정 자체에서 생동감을 얻는 사람 |
| 이어령 |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 | 삶을 대하는 철학과 태도의 문장 | 이미 많은 책임을 다했거나, 행동 목록 자체가 피로하게 느껴지는 사람 |
| 랜디 포시 | “예전에 무엇을 꿈꿨는가?” | 유년기 꿈의 복원과 순수한 열망 | 현실에 치여 사느라 내가 진짜 좋아했던 것이 무엇인지 잊고 지낸 사람 |
세 사람 모두 남들의 시선을 의식한 과시용 목표나 “남들이 다 가보는 핫플레이스 방문” 같은 껍데기 목록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죽음이라는 절대적인 한계선 앞에서 자신에게 가장 정직한 질문을 던졌을 뿐입니다.
나만의 목록을 찾는 3단계 템플릿
세 사람의 통찰을 바탕으로, 굳어있던 생각을 유연하게 풀어줄 실천 템플릿을 제안합니다. 세 칸을 억지로 다 채우려 애쓰지 마세요. 지금 가장 마음이 가는 질문 하나만 붙들어도 충분합니다.
- 1단계 (다빈치형: 지적 호기심)
- “살면서 여전히 그 이면이 궁금하고, 직접 배워보고 싶은 것 3가지는?” (예: 천체망원경으로 목성의 위성 관측하기, 내가 좋아하는 빵이 부풀어 오르는 원리 배우기, 동네 야생 조류 이름 5개 외우기)
- 2단계 (이어령형: 태도의 선언)
- “남은 시간을 살아가는 동안, 나는 일상을 ○○○하게 통과하고 싶다.” (예: 매사에 허둥대지 않고 천천히, 가까운 이의 말에 편견 없이 귀 기울이며,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담담하게)
- 3단계 (랜디 포시형: 잊힌 꿈의 소환)
- “어린 시절 아무런 대가 없이도 가슴을 뛰게 만들었던 그 일은 무엇인가?” (예: 다락방에서 그리던 만화 다시 펜 잡기, 피아노로 좋아하는 노래 한 곡 끝까지 연주하기, 숲속 오두막 짓기)
시작하는 이들을 위한 세 가지 질문
Q. 세 가지 패턴 중 반드시 하나를 골라야 하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어령 선생처럼 “서두르지 않는 태도로(2단계)”, 다빈치처럼 “매일 식물의 생장을 관찰하며(1단계)”, 포시 교수처럼 “어릴 적 좋아하던 프라모델을 조립해보는 것(3단계)”처럼 자연스럽게 엮어내도 좋습니다. 중요한 것은 타인의 기준이 아닌 ‘나의 언어’로 작성하는 것입니다.
Q. 목록을 적은 뒤에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작성한 목록을 책상 서랍 속에 혼자 묻어두지 마시고, 가족이나 결이 맞는 친구에게 가볍게 들려주세요. “나 요즘 딱따구리 혀 구조가 왜 그런지 궁금해졌어”라거나 “어릴 때 좋아하던 모형 비행기를 다시 만들어보고 싶어졌어”라고 말하는 순간, 그 생각은 단순한 공상이 아니라 일상 속 살아 숨 쉬는 대화와 실천으로 이어집니다.
Q. 이런 자기 성찰이 실제로 삶에 어떤 영향을 주나요?
국내 웰다잉(Well-Dying) 프로그램 참여자들을 대상으로 진행된 연구에 따르면, 죽음을 매개로 삶의 우선순위를 재정립한 집단은 그렇지 않은 집단에 비해 죽음에 대한 막연한 불안과 공포가 통계적으로 유의미하게 감소했습니다. 반면 자아통합감과 현재 삶에 대한 만족도는 크게 향상되었습니다. 결국 죽음을 미리 응시하는 작업은 끝을 준비하는 비장한 의식이 아니라, 남은 생을 온전히 내 뜻대로 살아내기 위한 가장 생생한 생명력의 회복입니다.
다빈치는 궁금한 것을 집요하게 물었고, 이어령 선생은 병을 마주하는 태도를 바꿨으며, 랜디 포시는 잊었던 어린 시절의 자신을 다시 만났습니다.
이들이 보여준 목록의 진정한 가치는 화려함이 아닌 ‘투명한 정직함’이었습니다. 버킷리스트의 빈칸이 아직 하얗게 남아있다면, 거창한 계획을 억지로 쥐어짜 내지 마세요. 세 거인이 남긴 질문 중 지금 내 가슴을 가장 세게 두드리는 물음 하나를 골라, 조용히 그 답을 적어 내려가 보시길 권합니다.
참고자료 (References)
- 김지수,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열림원, 2022
- Walter Isaacson, 『레오나르도 다빈치』, 아르테, 2019 (Codex Atlanticus 분석)
- Randy Pausch, The Last Lecture, Hyperion, 2008
- 정의정, 「웰다잉을 위한 프로그램의 효과분석: 노인의 죽음불안, 자아통합감 및 삶의 만족도를 중심으로」, 벤처창업연구, 2012
📚 함께 읽으면 좋은 글
IDiA 편집팀




댓글 0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