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킷리스트를 쓰라는데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을 써보세요.”
“… “

웰다잉 강의나 유튜브 영상에서 흔히 나오는 이 한 줄 앞에서, 드는 생각 : “아… 지금 나에게 1주일의 시간이 있다면 나는 뭘하고 싶지?” 저는 펜을 든 채 잠시 멍하게 있었습니다.. 예순이 가까워오면서 웰다잉이라는 단어가 남 얘기 같지 않게 다가왔고, 뭔가는 써야 할 것 같았는데 막상 종이는 비어 있었습니다.
여행 가고 싶은 나라? 뭐 많긴 하죠. 사고 싶은 것? 이 나이가 되니 물건에 대한 욕심도 예전만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경제적으로 여유가 넘쳐서 뭐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인터넷에 떠도는 “죽기 전에 해야 할 100가지” 같은 목록을 봐도, 크루즈 여행이나 스카이 다이빙 같은 것들은 저와는 거리가 먼 항목들뿐이었습니다.
이 막막함이 저 혼자만의 것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글은 정답을 알려드리는 대신, 제가 실제로 막막함을 뚫고 목록을 다시 써 내려간 과정을 그대로 나눠보려 합니다.
왜 버킷리스트 앞에서 머리가 하얘질까
돌이켜보니 이유는 명확했습니다. 세상이 보여주는 버킷리스트는 대부분 “어디로 갈 것인가”를 묻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 정말 필요했던 질문은 “무엇을 다시 느끼고 싶은가”였습니다. 화려한 목적지를 떠올리라고 하니 머릿속이 하얘졌던 것이지, 제 삶에 의미 있었던 순간을 떠올리라고 했다면 이야기는 달랐을 거 같았습니다.
또 하나, 저도 모르게 버킷리스트를 ‘한 번에 완성해야 할 거창한 계획표’로 여기고 있었던것 같아요. 그러니 부담스러워서 아예 시작을 못 했던 것입니다.
질문을 바꾸자 목록이 채워졌습니다
“어디에 가고 싶은가” 대신 이렇게 스스로에게 물어보기 시작했습니다.
1. 예전엔 좋아했는데, 지금은 안 하고 있는 게 뭐지?
저는 이십 대에 기타를 쳤습니다.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며 자연스럽게 손을 놓았는데, 그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습니다. 중고 기타 하나면 충분한 일이었는데, 몇 십 년째 버킷리스트에 오를 생각조차 못 했던 겁니다.
2. 누구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못 하고 있지는 않은가?
멀어진 형제, 연락을 미뤄온 옛 친구. 거창한 화해가 아니어도, 안부 인사 한 통이면 시작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3. 돈이 아니라 시간이 필요한 일은 무엇인가?
동네 도서관에서 책 읽어주는 봉사, 텃밭 가꾸기, 손주에게 옛날 이야기 녹음해서 남겨주기. 검색해보니 지역 평생학습관이나 주민센터에는 무료 또는 저렴한 비용의 프로그램이 생각보다 많았습니다.
4. 계절마다, 올해 놓치고 싶지 않은 순간은?
1년 전체를 한 번에 계획하는 대신, “이번 가을엔 단풍 아래서 막걸리 한 잔”, “겨울엔 첫눈 맞으며 동네 한 바퀴”처럼 작게 쪼개니 부담이 훨씬 줄었습니다.
경제적 여유가 없어도 시작할 수 있는 것들
돈이 드는 항목만 버킷리스트에 오를 자격이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제가 다시 써 내려간 목록의 8할은 비용이 거의 들지 않는 것들이었습니다.
- 지역 도서관·주민센터의 무료 문화강좌 신청해보기
- 오래된 사진첩 정리하며 그 시절 이야기 들려주기
- 연락이 끊긴 사람에게 안부 문자 한 통 보내기
- 매일 걷던 길 말고, 한 번도 안 가본 동네 골목 걸어보기
- 배우고 싶었지만 미뤄온 것 하나(악기, 외국어, 요리) 유튜브로 시작해보기
지금 바로 해볼 수 있는 작은 실천
- 빈 노트나 메모앱을 열고, “어디에 가고 싶은가” 대신 “무엇을 다시 느끼고 싶은가”를 적어보세요.
- 한 번에 다 채우려 하지 마세요. 이번 주에 한 줄, 다음 주에 한 줄이면 충분합니다.
- 비용이 드는 항목과 안 드는 항목을 나눠보세요. 의외로 안 드는 쪽이 더 많다는 걸 발견하게 됩니다.
- 누군가에게 목록을 보여주세요. 혼자 간직하면 흐지부지되기 쉽지만, 가족이나 친구에게 공유하면 실제로 실행할 확률이 올라갑니다.
자주 묻는 질문
Q1. 버킷리스트를 꼭 글로 남겨야 하나요? A. 형식은 중요하지 않지만, ‘글로 꺼내보는 행위’ 자체에는 근거가 있습니다. 미국의 정신과 의사 로버트 버틀러(Robert Butler)가 제시한 ‘인생회고(life review)’ 이론에 따르면, 지나온 삶을 돌아보고 언어화하는 과정은 노년기의 중요한 심리적 발달 과제로 여겨집니다. 메모앱, 노트, 녹음 파일 무엇이든 좋으니, 머릿속에만 두지 말고 형태가 있는 것으로 꺼내보시길 권합니다.
Q2. 목록을 다 실행하지 못하면 실패인가요? A. 아닙니다. 국내에서 노인을 대상으로 한 집단자서전쓰기 프로그램 연구(영남대 한국균형발전연구소, 2012)에서는, 8회에 걸쳐 자신의 삶을 글로 정리하고 나누는 것만으로도 참여자의 생활만족도가 높아지고 무망감(희망을 잃은 감정)이 줄어드는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다만 이 연구에서 자아존중감이나 우울감 자체에는 유의미한 변화가 없었다는 점도 함께 보고됐습니다. 즉 목록을 쓰고 돌아보는 행위 자체가 ‘완수’보다 ‘만족감’과 더 관련이 깊다는 뜻이며, 다 실행하지 못했다고 실패로 볼 근거는 없습니다.
Q3. 경제적으로 정말 여유가 없다면 웰다잉 준비를 미뤄야 할까요? A. 아닙니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작성은 국립연명의료관리기관에 등록된 기관을 통해 무료로 진행할 수 있고, 가족과의 대화 역시 비용이 들지 않습니다. 버킷리스트도 마찬가지로, 앞서 소개한 것처럼 돈이 아니라 시간과 마음이 드는 항목들로 충분히 채울 수 있습니다.
IDiA Insight
버킷리스트 앞에서 막막했던 이유는, 제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질문이 틀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디에 가고 싶은가”가 아니라 “무엇을 다시 느끼고 싶은가”로 질문을 바꾸는 순간, 텅 비어 있던 종이가 채워지기 시작했습니다. 혹시 지금 이 글을 읽으며 저와 비슷한 막막함을 느끼고 계신다면, 화려한 목록을 만들려는 부담은 잠시 내려놓으셔도 됩니다. 다시 하고 싶은 것 하나, 하고 싶었던 말 한마디면 충분한 시작입니다.
참고자료 (References)
국립연명의료관리기관, 사전연명의료의향서 등록 안내
Butler, R. N., “The Life Review: An Interpretation of Reminiscence in the Aged,” Psychiatry, 1963
“노인의 집단자서전쓰기 프로그램이 자아존중감, 생활만족도, 우울, 무망감에 미치는 효과”, 한국균형발전연구,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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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iA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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